사람을 닮은 지역화폐 ‘두루’

품앗이로 병원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곳이 있다. 심지어 약도 지을 수 있다. 그 정도라면 먹을거리나 입을거리는 두말할 나위도 없어 보인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돈이 없어도 생계 걱정을 덜 해도 되는 곳이라니 그저 놀랍기만 하다. 과연 가능한 얘길까.

그 사연이 궁금해 대전에 있는 한밭레츠를 찾았다. 한밭레츠는 지역 화폐를 매개로 회원들끼리 품앗이를 하는 공동체다. 아래는 9년 째 이곳에서 상근활동가를 하고 있는 박현숙님이 들려 준 이야기를 요약한 것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팟캐스트에서 들어볼 수 있다.

▲소셜잇수다에 출연한 한밭레츠 박현숙 두루지기

사람의 얼굴을 한 화폐, 두루

한밭레츠 회원들은 재화나 서비스를 거래할 때 화폐 ‘두루’를 사용한다. 그렇다고 외화나 사이버머니를 떠올려서는 안 된다. 두루는 환전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회원 각자가 가진 재능, 시간, 잉여 생산품 등을 다른 회원과 나눌 때 적립된다.

회원들에겐 통장과 같은 두루 계정이 부여되는데, 예를 들어 김장을 돕거나 더 이상 입지 않는 옷을 나눠주면 계정에 일정액이 적립된다. 물론 김장을 부탁하거나 옷을 받은 사람의 계정에는 일정액이 차감된다. 적립액보다 사용액이 많을 경우에는 마이너스 계정이 된다. 물론, 그렇다고 이자가 붙진 않는다.

얼핏 봐서는 종이돈이 발행되지 않을 뿐, 기존 화폐 시스템과 별 차이가 없는 듯하다. 하지만 둘 사이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우선 두루는 모으기 쉽다. 기존 화폐를 벌기 위해서는 직장을 다니거나 사업을 해야만 한다. 하지만 두루는 품앗이나 물물교환을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다 벌이 수단이 된다. 나눌 것이 없다면 비영리단체인 한밭레츠에서 자원봉사를 하거나, 회원들끼리 거래한 재화를 배달하는 일 등을 도우면 된다. 거래되는 품목들이 궁금하다면 한밭레츠 홈페이지 거래마당을 보면 된다. 이처럼 한밭레츠 안에서는 실직을 당해도 어느 정도 생계를 꾸려가는 것이 가능하다.

한밭레츠 홈페이지(http://www.tjlets.or.kr/)

두루로 하는 거래는 또한 관계를 수반한다. 전통적인 화폐 기반 시장에서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대면할 일이 거의 없지만, 두루와 같은 지역화폐 시장의 거래는 기본적으로 당사자들간의 대면을 전제로 한다. 거래가 늘어나는 만큼 사람들의 관계도 넓어질 터. 그러한 탓에 지역화폐를 사람의 얼굴을 한 돈이라고 부른다.

마지막으로 두루는 물가 수준이 낮다. 거래되는 것들이 회원 간 직거래다 보니 당연한 결과다. 헌옷이 500두루(1두루는 1원에 해당)에 거래되자, 한밭레츠에서 나서서 1천두루 수준으로 끌어올렸을 정도다.

그래도 진짜 돈이 낫지 않을까

한밭레츠 가맹점 중에는 민들레 의료생협에서 운영하는 내과, 치과, 한의원이 있다. 의료생협을 어렵게 시작하다 보니 두루보다 당장 현금 한 푼이 아쉬운 상황이었다. 당연히 반대가 심했지만, 의료생협 실무자가 급여의 30%를 두루로 받겠다고 초강수를 두면서야 겨우 두루를 받아들이게 됐다.

하지만 이 선택은 결과적으로 잘 한 일이었다. 막상 가맹점이 되니, 한밭레츠 회원들이 두루를 사용하기 위해 생협 조합원으로 가입했다. 두루 사용처도 생협 두루 계정이 마이너스가 될 정도로 요긴했다. 생협 직원들 식사 준비에 필요한 농산물 구입이나 조합원 활동비, 직원 급여의 일부를 두루로 지급했다. 두루가 실질화폐 못지 않게 쓰임새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당시 의사 급여에는 두루를 포함하지 않았는데, 한 의사는 두루 벌이를 위해 퇴근 후에 된장 배달 일을 하기도 했다.

매출에도 도움이 됐다. 의료생협에서는 의료보험이 적용되는 진료에 대해서는 전액 두루로 결제할 수 있지만, 비급여 진료에 대해서는 두루 결제를 총 진료비의 30%로 상한을 정해 놓았다. 설령 할인이라 쳐도, 두루 때문에 늘어나는 한밭두레 회원 비급여 환자 수가 할인 분을 메우고도 넘치게 할 수 있었다.

한편, 병·의원의 가맹점 가입은 두루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은 계기가 됐다. 병원 치료까지 가능하다니……. 이 일로 두루 거래 건이 3배 이상 늘어났다.

한밭레츠 가맹점인 민들레 의료생협.(http://www.mindlle.org/)

생산자와 함께 성장하는 한밭두레

회원 중에 닭을 몇 마리 키우는 분이 있었는데, 남는 계란이 있어 한밭레츠 만찬 때 가져온 적이 있었다. 유정란이라 그런지 반응이 좋았다. 일부 회원들이 주문해서라도 계속 먹고 싶다고 하자 사육두수를 늘리게 되었다. 찾는 사람이 계속 늘어났고, 현재 사육두수가 수천마리에 이르게 되었다. 바빠진 농장일은 장애인 회원 고용으로까지 이어졌다.

회원수 560여 가구, 연간 거래건수 1만5천건

훨씬 더 많았지만 연락이 두절되거나 오랜 기간 활동이 전혀 없는 분들, 회비를 장기 체납한 분들을 몇 년 전 한꺼번에 정리했다. 회원 수로 세를 과시하기보다는 실제 회원들에게 내실 있는 관리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규모는 그래도 지난 해 연간 거래 건수는 1만5천건에 이르렀다. 거래 액수로 치면 두루, 현금 모두 포함해 3억원 가량이다.

3억원이라고 얕봐서는 안 된다. 두루로 거래되는 것들은 시중가보다 훨씬 싸다. 한밭레츠가 창출한 경제 효과는 몇 배 이상이라는 얘기다.

두루지기 박현숙님의 살림살이는 나아졌나

두 아이가 있는데, 8년 터울이다. 큰 아이 것을 물려주기엔 나이차가 너무 컸다. 하지만 한밭레츠 덕분에 둘째한테 필요한 모든 것들, 이를테면 교육, 속옷, 양말 등을 다 해결했다. 거의 새옷을 사 입힌 적이 없다. 새옷을 사도 한밭레츠 가맹점에서 샀다.

하지만, 경제적인 실리 보다는 심리적인 만족감이 더 컸다. 많은 사람들을 사귀고 깊이 있는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었다. 뭐가 좋다고 맨날 가냐면서 종교단체나 다단계업체로 오해한 사람도 있었을 정도다. 사실, 한밭레츠에는 거래로 이익을 내겠다는 사람보다는 이웃이 좋아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지역화폐, 머리로 이해하지 말고 직접 체험해보길

한밭레츠가 국내서 가장 활성화된 지역화폐 공동체다보니 여기저기서 많은 사례 발표 요청도 들어온다. 그런데 막상 발표를 하면 어려워들 한다. 자꾸 기존 화폐 개념으로 이해하려 들기 때문이다. (나 역시 ‘두루 계정의 마이너스는 부채 아니냐’고 계속 되물었다.)

그래서 체험으로 배워볼 수 있도록 품앗이 놀이학교를 열었다. 가져온 물품으로 직접 품앗이 거래를 해 볼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이다. 그렇게 하니 사람들 반응이 ‘재미있네요. 별 거 아니군요’로 바뀌었다.

지역화폐를 체험해 본 사람들은 지역화폐 도입을 고려하지 않는 사람도 경험해야 한다고 말한다. 돈에 대해 단단하게 굳어진 고정관념을 깨 주기 때문이란다.

13년 걸린 지역화폐 시스템, 필요한 것은 인내심

요즘 여러 지자체에서 지역화폐 육성에 나서고 있다. 지원금이 들어가는 만큼 단기간에 성과를 내 줄 것을 주문한다. 하지만 지역화폐는 사람의 관계와 상호간의 신뢰를 쌓는 일이기에 시간이 필요하다. 조급증을 가져선 안 된다. 그 보다는 긴 호흡을 가지고 이웃과 재미를 쌓는다는 생각으로 접근해야 한다. 한밭레츠의 현재 상황이 되는 데에만 13년이 걸렸다. 성과를 내겠다는 조급증 보다는 이웃과 재미를 나눈다는 태도로 임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역화폐 외에도, 요즘 ‘공유경제’라 해서 재화를 이웃과 나눠 쓸 수 있게 돕는 서비스들이 늘어나고 있다. 아마도 계속되는 불경기 탓이리라. 이번 한밭레츠의 사례는 이들 공유경제 스타트업들에게도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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