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자 협동조합 사례를 찾던 중 중곡제일시장 상인들이 협동조합을 만들어 대형마트를 이겨냈다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내용을 살펴보니 협동조합 결성 이후 매출도 2배나 뛰었다고 한다. 호기심이 발동했다. 비결이 알고 싶었다.
하지만 직접 찾아가 확인한 사실은 조금 달랐다. 협동조합을 결성한 지 햇수로 10년. 그 동안 많은 노력을 했고 매출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시장 상인들의 살림살이는 오히려 나빠졌다고 한다. 더 의아했던 것은 기업형 슈퍼마켓(SSM)이 시장 한복판에서 버젓이 영업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어찌 된 일일까. 박태신 조합 이사장에게 먼저 조합 사무실 바로 건너편에 자리한 이마트 에브리데이에 대해 물었다.
재래시장과 SSM의 아슬아슬한 공생 관계
박태신 이사장은 중곡제일시장이 SSM과 경쟁하면서 동시에 공생도 한다고 설명했다. 흔히 대형마트나 기업형 슈퍼마켓이 전통시장을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고 하는데, 이들과 공생이라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요즘 소비자들은 한 장소에서 필요한 상품을 모두 구매하는 일괄 쇼핑을 선호합니다. 하지만 전통시장은 공산품이나 가공식품이 취약합니다. 소비자 입장에서 볼 때 전통시장의 매력이 떨어지는 부분입니다. 시장 안에 있는 기업형 슈퍼마켓은 바로 이러한 약점을 보완해줍니다. 자본을 앞세운 판촉 프로모션도 도움이 됩니다. 광고 전단을 보고 찾아온 슈퍼마켓 고객들은 더 싸고 신선한 먹을거리를 찾기 위해서라도 시장을 함께 둘러봅니다.”
물론, 이 말이 기업형 슈퍼마켓의 시장 입점을 환영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는 대형마트나 기업형 슈퍼마켓을 원천 봉쇄하지 못할 바에야 그것들을 시장 바깥에 두느니 차리리 시장 안에 두는 편이 낫다는 말이 하고 싶었던 것이다.
설령 그래도 문제는 생긴다. 그들과 전통시장이 판매하는 상품들은 상당부분 겹친다. 적지 않은 시장 상인들이 피해를 볼 수 밖에 없다.
그런데도 그가 공생을 말하는 것은 중곡제일시장은 상품 경쟁력이 있다고 자신하기 때문이었다.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중곡제일시장 상인 협동조합은 시장 고객들에게 기업형 슈퍼마켓보다 나은 할인 혜택을 제공하고 있었다.
다만, 이 대목에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공생이 중곡제일시장에만 특수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경쟁력이 없는 전통시장이 시장 안에 기업형 슈퍼마켓을 두는 것은 고육지책일 뿐, 얻는 것 보다는 잃는 것이 더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선 이 상황이 시장에게 최대 위협이 될 수도 있다.
아무튼, 중곡제일시장은 기업형 슈퍼마켓이 최대 위협은 아니라 했다. 박태신 이사장은 진짜 위협은 따로 있다고 했다. 바로 시장 상가의 건물주들이다.
▲소셜잇수다에 출연한 중곡제일시장 상인협동조합 박태신 이사장. 1977년부터 중곡제일시장에서 금은방을 운영하고 있다.
시장 상인들, 협동조합으로 시장 살리기에 나서다
2003년 중곡제일 시장은 IMF 위기 여파로 고사상태에 빠져 있었다.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그러던 중 지자체에서 협동조합을 만들면 아케이드 공사비를 보조해주겠다는 제안이 들어왔다.
그 해 11월 협동조합을 설립했는데, 출자금을 내야 하는 부담에도 불구하고 상인들의 절반 가량이 바로 조합원으로 가입했다. 시장 상황이 그만큼 절박했던 것이다. (지금은 시장 상인 전원이 조합원으로 가입한 상태다.)
그렇게 해서 시장 골목에는 비와 햇빛을 막아주는 아케이드가 설치되었고, 이후 지자체의 도움으로 주차장과 고객 쉼터 등 각종 편의시설들이 추가로 들어서게 되었다.
하지만 상황은 기대했던 만큼 달라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고객 편의시설만으로 시장을 찾진 않았다. 고객이 원하는 것은 매력적인 상품이었다. 이는 기업형 슈퍼마켓과의 경쟁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협동조합은 시장 상품권과 쿠폰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시장 상품권에는 3~10% 할인 혜택을 제공하고, 상인들은 구매액의 1~2% 정도에 해당하는 액수만큼 적립쿠폰을 나눠주게 했다. 할인율만 놓고 보면 결코 대형마트에 뒤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제서야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지난 해 매출만 놓고 볼 때 중곡제일시장 매출은 협동조합 설립 직전에 비해 2배까지 늘어났다.
중곡제일시장의 진짜 위협, 상가 건물주
협동조합이 열심히 노력해 시장 상권을 살리면 살릴수록 부동산 가치가 올라갔다. 상인들이 건물주라면 모를까 대부분이 세입자였기에 이는 재앙에 가까웠다. 건물주들이 부동산 시세를 반영해 임대료를 올려달라 요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사람이 버는 상황이 벌어졌다. 협동조합의 노력으로 늘어난 수익은 온전히 임대료 인상분을 채우는 데 들어가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상인들간의 가격경쟁까지 치열해져 수익성은 더 나빠졌다. 박태신 이사장은 이처럼 매출은 늘었지만 수익은 줄어든 상황을 ‘빛 좋은 개살구’에 비유했다.
더 안타까운 것은 협동조합이 더 많은 자구책을 마련했는데도 상황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협동조합은 조합원들의 세입자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로펌과 계약해 법률 상담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조합에서 매달 자문료로 납부하는 비용은 14만원. 사실상 사회공헌에 가까운 법률자문이었지만 모든 조합원들은 언제든 전화로 변호사와 법무 상담을 할 수 있게 됐다.
다음으로는 아리청정이라는 협동조합 브랜드를 만들어 시장 상인들에게 위탁 생산한 참기름, 건어물, 떡, 육가공식품 등을 온라인으로 판매하기 시작했다. 판매 수익을 배당금으로 돌려줘 조합원들의 수익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자구책에도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법률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됐다 해도 건물주의 임대료 인상 요구에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법에서 허용한 연간 임대료 상한 폭 9%는 철저히 건물주의 재량이었다. 심한 경우 매년 9% 인상을 요구하는 건물주도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변호사의 도움으로 건물에서 쫓겨나는 일만큼은 어떻게 해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현행법상 임대 기간이 5년을 넘기면 건물주의 요구가 있을 경우 가게를 비워줘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건물주의 돈 욕심 때문이라면 이젠 협동조합에서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가게 앞에다 같은 업종의 노점을 차려버리겠다고 응수를 합니다. 협동조합에서 골목 아케이드를 설치한 만큼 그 아래 공간에 노점을 차리는 것이 편법으로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죠. 다 법을 알게 된 덕분입니다.”
아리청정 사업도 초기여서 그런지 아직은 큰 성과를 내진 못했다. 아무리 조합원들이 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라 해도 온라인 유통은 낯설었다. 온라인 마케팅은 해 본 적도 없었다. 지난 해 사업을 시작해 올 해 처음 배당을 했는데, 출자금의 2% 수준에 불과했다. (출자금에 대한 이자 배당 4%를 포함하면 총 배당은 6%였다.)
중곡제일시장의 지속 가능한 생존조건
박태신 이사장은 ‘빛 좋은 개살구’ 같은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꿀 해결책이 있다고 했다. 협동조합이 다음 세 가지를 해 낸다면 시장 상인들의 생존은 지속 가능할 것이라는 말이었다.
먼저 조합원들이 출자금을 더 모아 상가건물을 하나씩 인수한다. 그러면 임대료를 낮출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상인들간의 상품 품목도 조정하고, 가격 경쟁도 통제할 수 있게 된다.
다음으로는 정부의 도움으로 대형마트나 기업형 슈퍼마켓 판매 상품을 시장 상인들의 상품과 겹치지 않게 제한한다. 적어도 대다수의 시장 상인들이 판매하는 야채, 생선, 정육만큼은 지켜내야 한다.
마지막으로는 두 번째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경우 소비자들도 조합원으로 참여시켜 조합 슈퍼마켓을 만든 후 기업형 슈퍼마켓과 경쟁한다.
하지만 이 해결책 또한 시장 상인들이 계속 생존했을 때 가능한 얘기로 들렸다. 현재 매월 출자금으로 모이는 액수는 500만원 가량. 그 정도로 상가 건물 한 채라도 인수하려면 5년 이상 돈을 모아야 한다.
대형마트의 취급 품목을 제한하는 것도 실현 여부가 불확실하다. 그 대안으로 소비자와 함께 조합 슈퍼마켓을 만들 수 있겠지만 이 또한 시간이 필요하다. 아직까지 국내 소비자들에게 협동조합은 생소하다.
부정적으로 서술한 이유
여기까지가 이번 인터뷰의 요약이자 소감이다. 이야기를 다소 부정적으로 풀어나간 것은 중곡제일시장 상인협동조합의 의미를 축소하기 위해서가 아니란 점을 밝히고 싶다. 팟캐스트에서 들어보면 알겠지만, 중곡제일시장 상인협동조합의 활동은 다른 전통시장이나 상가 상인회가 충분히 벤치마킹할만한 것들이었다.
그런데도 그리 한 것은 성공이라는 측면을 부각했다가 자칫 대형마트나 관련 행정당국이 이런 핑계를 댈까 걱정해서다.
“봐라. 노력하면 되지 않느냐.”
시장 상인들이 치열하게 노력을 했는데도 살림살이가 나빠졌다면 뭔가 구조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다. 중곡제일시장이 이 정도라면 다른 전통시장들의 사정은 오죽할까. 그러한 구조적인 문제는 제도가 해결해야 한다.
자, 머리 아픈 얘기는 여기까지. 근본적인 해결은 전문가나 관련 당국에 맡기자. 우린 이런 문제가 있다는 정도만 인지하고, 우선은 중곡제일시장 상인협동조합의 활동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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