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희 작가는 페이스북에 크로키 작품을 소개하면서 호기심에 경매를 붙여봤다. 곧바로 가격을 제시하는 댓글이 달렸다. 경매가 5만원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호가와 버무려진 작품 감상평이 올라오는 것도 신기했다.
이 작가는 가능성을 보았다. 혼자서 그 가능성을 살리려 애쓰는 것보다, 여러 예술가들과 힘을 모으는 것이 더 많은 대중의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 작가는 그런 생각으로 미술계 지인 몇 분과 의기투합했고, 2011년 12월 페이스북 그룹 ‘페이스북 미술품 경매(페미경)’를 만들게 되었다.
페이스북 미술품 경매를 시작하게 된 배경
이 작가가 그룹 ‘페미경’을 만들게 된 데는 예술가들의 막막한 현실도 이유로 작용했다. 그는 홍대 미대를 나온 미술 엘리트였지만 예술가로서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사람들은 예술가라 하면 우아한 삶부터 떠올리지만 실상은 달랐다. 예술가들에겐 백조가 수면 아래에서 다리를 쉴새없이 움직여야만 하는 그런 처절함이 있었다. 후배 중엔 갓 태어난 아이의 우유값을 대기 위해 날품을 파는 이도 있었다.
그러던 중 이 작가는 페이스북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이 작가는 페이스북만 잘 활용하면 무명예술가들도 작품을 대중들에게 소개하고 직접 판매까지 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했다. 꼭 판매가 이뤄지지 않아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사실, 예술가들이 작품을 소개할 수 있는 경로는 갤러리 전시 정도에 불과했다. 그것도 수백만원 이상의 비싼 대관료를 지불하거나 그룹전에 참여해야만 가능했다. 설령 전시할 기회를 잡았다 해도 전시장까지 찾아 오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쩌면 예술가들이 예술을 중단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작품을 봐 주는 이 없는 데서 오는 고독일 것이다.
그런 만큼 이 작가에게 페이스북의 의미는 특별했다. 잘 하면 지구촌 사람들에게까지 우리 예술가들을 소개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 작가가 그룹 ‘페미경’을 만든 건 꼭 예술가들을 위한 대의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미술을 공부하는 두 자녀가 있다. 그가 작품활동에 소홀하면서까지 ‘페미경’ 활동에 매진하는 것은 자녀들만큼이라도 예술가들이 대접받는 세상에서 살게 만들고 싶다는 아버지의 바람 때문이기도 했다.
▲ 소셜잇수다에 출연한 이종희 작가. 왼쪽에 있는 조형물은 페미경에서 경매로 팔린 그의 작품 ‘바라보다2′.
14개월 후의 페이스북 미술품 경매
이 작가는 일부러 페이스북 개인 계정의 친구를 늘리면서, 그들을 ‘페미경’ 그룹으로 초대해 나갔다. 쪽지를 보내 예술가들에게 관심을 보여야 하는 이유를 호소하기도 했다.
‘예술가들의 현실은 어렵습니다. 댓글과 좋아요로 박수를 쳐 주세요. 그것이 예술가들이 작품 활동을 계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이 작가는 그룹 운영진인 화방넷 김견남 대표에게 도움을 받아 화방넷 홍보채널로도 ‘페미경’을 소개했다. 그렇게 1년 2개월이 지나자 ‘페미경’ 그룹 회원수는 5400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요즘은 회원들의 친구 초대와 자발적 가입이 부쩍 늘고 있는데, 초대를 언짢아 하지 않고 오히려 고마워 하는 분위기까지 생겨났다. 예술과 거리가 멀었던 대중들에게 ‘페미경’은 많은 예술가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는 신천지이기 때문이다.
이작가는 예술가들 사이에서도 ‘페미경’이 입소문 나기 시작했고, 그 덕에 서양화, 동양화, 조각, 공예, 사진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의 참여가 줄을 잇는 중이라 했다. 그리고 그 연령대 또한 원로 예술가에서 신진 예술가에 이르기까지 두터워지고 있는 추세라 했다.
페이스북 미술품 경매의 역할
‘페미경’은 예술품 장터이기 이전에 예술가들과 대중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공간이다. 그런 만큼 이종희 작가는 예술가들끼리 서로 친분을 쌓고, 예술가들이 대중과 소통하며, 대중들에게는 예술 정보를 소개해 그들이 예술에 한발짝 다가설 수 있는 채널로 ‘페미경’을 활용해 왔다.
그 결과 ‘페미경’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의 관계가 다른 어떤 예술단체에서보다도 더 끈끈해졌다. 동병상련, 서로 비슷한 처지에 있는데다, 24시간 언제든 서로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페미경’은 오프라인 번개 모임도 자주 가져왔는데, 그럴 때마다 함께 힘을 모을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고, ‘페미경’ 활동 예술가 공동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이작가는 예술과 거리가 멀었던 대중들을 위해선 ‘페미경 미술시간’, ‘페미경 미술정보’, ‘페미경 예술가 방’ 같은 코너를 연재해왔다. 다행히 최근 들어서는 예술가들 스스로가 자신의 일상을 여과 없이 올리기 시작했다. 한 예술가는 노래 부르는 영상을 소개했고, 그 영상을 본 몇몇 예술가들이 ‘막불러 중창단’을 결성하기도 했다.
예술가들이 페이스북 미술품 경매을 찾는 이유
예술가들이 ‘페미경’을 찾는 이유는 꼭 경매라는 방식으로의 작품을 직거래하기 위함 때문만은 아니다.
예술가들은 제 작품을 알리는 데 서투르고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쑥스러워하기 때문에 대중이 몰려있는 공간에서도 소극적이다. 그런 만큼 이종희 작가는 다른 예술가들을 대신 홍보해 주는 데에도 앞장서 왔다.
예술가가 그냥 작품 사진만 올려놓아도 이작가가 예술가와 작품, 관련 전시회와 다른 정보들을 찾아 댓글로 소개해준다.
이 작가는 요즘 전시회장이나 작업실을 찾아가 현장 모습을 동영상으로 담아 소개도 한다. 최종 결과물로서의 작품이 아닌, 과정으로서의 작품, 예술가의 삶의 일부로서의 작품을 보여주기 위해서라 했다. 그 목적으로 소개한 동영상은 백여개나 된다 했다.
이 작가는 ‘페미경’은 전시회 홍보 채널로도 유용하다고 했다. 예술가들은 전시회를 알리기 위해 주소록을 사기도 했다. 돈을 들여 우편 발송을 하지만, 반송되는 일이 허다했다. 하지만 ‘페미경’은 일회성이 아닌 지속적으로 전시회를 홍보할 수 있는 공간이다. 멀티미디어를 활용하면 더욱 입체적인 정보도 전달할 수 있다.
이 작가는 이런 장점 때문인지 ‘페미경’ 덕에 작업을 다시 시작하게 됐다는 예술가들이 나타나고 있다 했다. 꼭 작품을 판매하고 홍보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팬이 생겨나 힘을 얻었기 때문이란다.
경매를 선택한 이유
예술가들에게 작품 가격은 자존심일 수 있다. 그런 까닭에 ‘페미경’에 올라오는 작품들이 다 고가라면 대중이 외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종희 작가가 경매라는 형식을 도입한 것은 그 때문이다. 경매를 하게 되면 아무리 1원으로 시작한다 해도 그 가치는 억단위로까지 올라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그런 만큼 경매는 대중의 접근성을 담보하면서도 예술가의 자존심을 지켜주게 되는 것이다.
‘페미경’의 경매 방식은 아주 단순하다. 예술가가 시작가를 지정하면 댓글로 호가를 한다. 댓글로 경매에 참여하다 보니 예술가들은 누가 작품에 관심을 보이는지를 알 수 있고, 호가와 함께 늘어 놓는 작품평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작가는 경매가 마감될 즈음엔 한바탕 축제 분위기도 연출된다고 했다. 경매에 참여한 사람들과 동료 예술가들이 작품이 얼마에 낙찰되는지 숨죽여 기다리다 경매가 마감되면 모두가 박수로 축하해주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에게 바라는 점
이종희 작가는 올해 설 맞이 ‘페미경’ 선물전을 기획했다. 경매가 아닌 온라인 전시 판매전이었다. 예술작품을 설 선물로 주고 받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예술가들에게 판매할 작품을 그룹 사진첩에 올려달라 요청했고, 꽤 많은 작품들이 등록됐다. 하지만 성과는 좋지 않았다. 작품 가격 때문이었다.
예술가들은 고가 위주로 작품을 내놓았다. 1천만원을 호가하는 작품도 있었다.
이 작가는 반응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 했다. ‘페미경’으로 대중들의 예술품 구매에 막 불을 지피고 있는 상황에서 고가 예술품은 시기상조였다. 사실 모니터로만 보고 100만원이 넘는 작품을 사긴 쉽지 않다. 고가의 작품이 팔리기 위해선 시간이 더 필요하다. 아는 만큼 작품에 부여하는 가치도 커질 터, 아직은 예술가들이 자신과 작품을 더 많이 알리는 게 필요하다.
그런 까닭에 이 작가는 예술가들에게 당분간은 저가의 예술품도 함께 올려달라고 요청한다 했다.
이 작가 스스로가 마중물 역할을 하기 위해 얼마 전 본인의 크로키 작품 경매를 호가 1원으로 시작했다. 그래도 최종 낙찰가는 18만원이 됐다.
이 작가는 예술가들이 ‘페미경’에 작품을 올릴 때 사진의 질과 소개하는 내용에 더 많은 신경을 쓰길 바란다 했다. 소셜미디어에는 이미지가 넘쳐나기 때문에 평범한 작품 사진 한 컷만으로는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아 둘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캔버스의 뒷면이나 측면까지도 보여주겠다는 마음, 예술가의 창작 의도까지도 전달하겠다는 그런 자세가 필요할 것이라 했다. 실제 작품의 느낌을 고스란히 살릴 수 있도록 사진 촬영 기법이나 멀티미디어 활용 능력도 키워야 할 것이라 했다.
이작가는 예술가들이 페이스북 프로필 관리도 신경을 써야 한다 했다. ‘페미경’에 소개되는 작품이 마음에 들 경우 예술가에 대해 더 알아보고자 그의 프로필을 방문하게 되는데, 이 때 보여지는 담벼락이 엉망이라면 힘들게 이뤄진 방문의 의미가 퇴색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프라인과 병행하다
이작가는 지난 해 ‘페미경’ 회원인 김동호 목사님의 도움으로 제 1회 오프라인 ‘페미경’ 전시회를 열 수 있었다. 낙도에 방치된 독거노인을 돕는 것이 전시의 목적이었다. 전시회 작품 판매 금액의 40%를 성금으로 보내기로 한 것인데, 장소를 지원해준 목사님과 많은 기독교 언론이 홍보를 도와줬다.
덕분에 500만원 가량 기금을 조성할 수 있었다. 예술가들이 비록 힘 없는 약자지만 그래도 남을 도울 수 있다는 보람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했다.
‘페미경’은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오프라인 전시회를 진행해 왔다. 그리고 그 때마다 일부 작품은 ‘페미경’ 그룹에서 경매로 판매해 왔다.
앞으로의 활동 계획
요즘은 ‘페미경’에 많은 작품들이 올라오다 보니, 새로 등록된 작품이 금방 아래로 밀려나곤 한다.
이 때문에 이 작가는 조각작품 경매, 공예작품 경매, 사진작품 경매 등 세분화된 그룹들을 추가로 개설했다. 그는 이 세부 그룹들을 활성화시킬 계획이라 했다.
한편 더 많은 예술가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선 더 많은 대중들을 참여시켜야 한다. 예술가와 대중은 닭과 달걀의 관계지만, 이작가는 대중 저변을 넓히는 쪽에 주력할 생각이라 했다.
페이스북은 국제적인 소통 채널이다. 다행히 그룹 회원 중에 영어에 능통하고 국제 커뮤니티에서도 동하고 계신 분들이 있어, 이 작가는 이 분들의 도움을 받아 국내 예술가들을 해외에 소개해 나갈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소셜미디어 시대의 예술
이 작가는 사람들이 이사를 가면서 버려놓은 그림을 볼 때마다 예술을 귀히 여기지 않는 현실에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이유는 예술품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다. 누가 어떤 생각으로 만든 것 인지를 안다면 소중히 여길 텐데, 아는 바가 없으니 벽에 걸린 인테리어 소품 정도로 치부해버리는 것이다. 오프라인 갤러리에서 구입한 예술품이라고 크게 다를까. 작가와 작가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면 그 또한 소장품 이상의 의미가 없을 것이었다.
이 작가는 페이스북 덕에 이런 상황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예술가들이 페이스북을 한다면, 대중들은 예술가의 담벼락에서 드러나는 그의 생각, 철학, 일상의 문맥 안에서 작품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작품을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만큼 작품에 부여하는 가치 또한 올라가게 될 것이란 얘기였다.
그 동안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어떤 대접을 받는지 궁금해했다. 이 작가는 페이스북이 이런 궁금증도 해소해 줄 것이라 했다. 페이스북 고객들은 자신의 작품이 어떤 공간에서 어떤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있는지를 사진으로 알려줄 수 있다.
마치며
이 작가의 말대로 소셜미디어가 예술가들에게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예술가들 스스로 그 가능성을 살리기란 어렵다. 소셜미디어에 익숙해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친구가 적다면 작품을 소개할 흥이 나지 않는다. 흥이 나야 페이스북 활동을 지속해 나가고, 그 결과 팬도 늘고, 종국에는 고객도 생겨날 텐데 말이다.
그래서 이 작가와 ‘페미경’이 고맙다. ‘페미경’에는 예술가들을 환영하고 소통할 준비가 된 5천명의 친구들이 있다. 예술가를 조명해주고 소통을 도와줄 운영진도 있다. 예술가들이 ‘페미경’ 활동을 한다면 친구도 늘고, 어느 순간 소통에 대한 감도 익힐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예술을 사랑하는 분들에게 한 말씀. ‘페미경’에 올라오는 예술 작품들에 ‘좋아요’와 댓글로 관심을 표현해주길 바란다. 그것이 예술가들이 작품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자양분임을 꼭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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